걸레성자 해석 손정도 목사의 삶이란?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다큐 걸레의 삶을 산 성자

상하이 임시정부 설립의 주역이자 만주 지린 한인사회의 아버지였던 손정도(사진)가 재조명되고 있다.

성탄특집 임시정부 100년 기획(2부작)으로 ‘걸레성자 손정도’편을 방송했다. 

“나는 비단이 아니라 걸레의 삶을 살겠다” 라는 말처럼 '걸레'의 삶을 선택했던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의 삶을 통해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사랑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나선다.


손정도 목사는 1882년 평북 강서에서 태어나 숭실중학교를 다니면서 평양대부흥을 경험했다.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선교사로 파송돼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한 손 목사는 전남 진도에 유배돼 옥중에서도 많은 결신자를 세웠고, 풀려난 이후 정동제일교회를 담임하면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부흥시켰다

해석(海石) 손정도 목사(1882-1931)는 상하이 임시정부 출범에 주도적 역할을 한 후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과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중국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당시 손정도(두번째줄 왼쪽 여덟번째) 일곱번째는 이승만


그는 임시정부 활동 이전부터 안창호와 친분이 깊었다. 안창호와 흥사단을, 박은식과 대한교육회를 조직하는데 협력했다. 또 무장단체 의용단과 한국노병회를 김구와 함께 조직했다. 

앞에 나서고 공로를 챙기기보다는 스스로를 낮추며 궂은 일을 도맡고 남을 조력하는 그의 성품을 갖췄다. 스스로 특정 노선을 대표하지도 않았고, 갈등 조정과 화합에 힘을 썼다. 지린에서는 열다섯 살 소년 김성주(훗날 김일성 북한 주석)를 돌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그의 이름은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안창호 선생과 손정도 / 사진: 손정도기념사업회

 
손정도는 1910년 감리교단 중국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하다 1912년 ‘가쓰라 암살음모사건’ 주모자로 하얼빈에서 체포돼 참혹한 고문을 받았다. 증거도 자백도 없는 상태에서 일제는 거주제한 1년형을 내려 그를 진도에 유배했다. 

유배를 마치고 풀려난 손정도는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이 때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폐위된 채 덕수궁에 유폐된 고종과 만나게 된다. 

고종은 새로운 밀사 파견을 계획하고, 의친왕의 특사행을 추진할 인물로 손정도에 주목한다. 손정도는 이에 정동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게 된다. 이후 그의 활동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난 손정도는 ‘호조(互助) 운동’에 마지막 힘을 다했다. 호조 운동은 서로 도우며 자급자족하는 이상촌을 건설하는 것으로, 최종 목적은 무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었다. 

손정도는 안창호와 함께 ‘농민호조사’를 설립하고, 만주 액목현 일대에 토지를 매입한다. 그러나 100여호가 입주한 농민호조 이상촌은 일제의 방해공작과 만주 침략으로 실패한다. 

고문 후유증과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한 손 목사는 일본 전향을 끝까지 거절하다가 1931년 2월19일 밤 12시 49세의 나이에 순교했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조국 독립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나서야 찾아왔다. 

손정도 목사의 가족사진 / 사진:손정도기념사업회


손정도의 장남 손원일은 해군 제독이 되어 ‘대한 해군의 아버지’고 불리고 있다. 차남 손원태는 미국 유학 후 재미교포 의사가 됐다. 양자처럼 돌봐주고 후원한 소년 김성주는 북한 주석이 됐다. 

비단이 아닌 걸레의 삶을 선택한 독립운동가 손정도의 삶은, 갈등과 분열을 넘어 평화와 화합의 시대로 나아가는 길을 오늘날까지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정부는 1996년 9월 11일 국내로 손정도 목사의 유해를 봉환했고, 12일 국립묘지 임정요인 묘역에 안장했다. 정부는 애국지사 손정도 목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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